외무성 「다케시마」 팜플릿 비판
(7) 샌프란시스코 강화(평화)조약
2008/5/5
야후! 게시판 ‘竹島’ No.16523
팜플릿은 강화조약의 성립과정에서 다케시마=독도가 일관되게 일본령으로서 취급되어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자료를 자의적으로
선택한 결과일 뿐 입니다.
외무성은 진실을 정확하게
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듯 합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방침이 몇 번이나 크게 바뀌어서, 강화조약안도 굉장히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외무성 왈(曰)「7.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기초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다케시마를 포함시키도록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다케시마가 일본의 관할하에 있다고 해서 이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
외무성은 「긍정하고 있는 것」 이라고 썼습니다만, 이 취지는 강화조약으로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라고
하는 것을 각국으로부터 승인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혹시, 그런 게 아니라면, 위와 같이 쓰는 것은 일본 국내를 향한 단순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50여 년 전의 외무성은 한국정부 앞으로 보낸 공식서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평화조약은 「일본국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라고 규정하고 있지만(제2조), 여기서 규정하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라는
것은 일한합병이전의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일본이 인정했다고 말하는 것이고, 다케시마는 이미 일한병합이전에 시마네현이 관할하고 있었고, 또한 합병 후에도 시마네현의 관할 하에 두어서, 조선총독부의 관할 하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 그 섬이 일본영토의 일부임은 의론의 여지가 없다.(주1)
외무성은 국내용 발언과 달리, 한국에 대해 강화조약에서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영토임이 승인되었다는 등의 주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측이 다케시마=독도는 강화조약으로 한국령이라는 것이 승인 되었다고
하여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946년 1월 29일자 연합군총사령관지령 제677호는 독도를 확실하게 일본의 영유권밖에 두고, 대일 강화조약에는 일본영토문제에 관한 한 연합군총사령관지령의
조항과 모순되는 조항은 없다. 강화조약은
이 문제에 관한 연합군총사령관의 의향을 아무런 실질적 변화 없이 확인 했다. …
대일강화조약에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정당한 영유권주장에 모순되는 조문은 없다. 그리고 대일강화조약 제1장 제2조 A에 따라,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울릉도와 함께
한국령으로 승인되었다고 해석된다(주1)
한국정부의 주장입니다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다케시마=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 내지는 한 쌍의 섬으로
생각되어 온 만큼 다케시마=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강화조약으로 한국령이 되었다고하는
주장은 자연스러운 논법입니다.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반론의 논리가 주목됩니다.
한국측에서는 평화조약에 따라 다케시마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울릉도와 함께 한국령으로 승인되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평화조약의 조문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다.
일한합병이전에 다케시마가 한국의 영토였다고 하는 법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이상 평화조약
제2조에 관한 한국측의 해석은 성립 할 수 없다(주1).
일본 정부는 만일 한국이 한일합병이전에 다케시마=독도가 한국영토였다는 법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한국 정부의 강화조약에 대한 해석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함부로 강화조약으로
다케시마=독도가 일본령이 되었다는 등의 주장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정부는 강화조약 당시에 있어서 다케시마=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논리만으로는 조금
약하다고 보았는지,
조약에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으로서 명확하게 기술시키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 과정의 일부는 외무성 팜플릿에 적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한 노력은 당초에는 좋은 결과를 얻어, 미국과 영국의 각 강화조약 초안에서 다케시마=독도는 한국령으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다케시마=독도를 통치하고 있었던 상황으로부터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1946년 1월 다케시마=독도는 연합군 SCAPIN 677호 지령에 따라 일본의 지배로부터 분리되어 미군정청 (美軍政廳)의 관할 하에 두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1948년에 독립하자마자, 미 군정청으로부터 다케시마=독도를 정식으로 인계 받았습니다.
인계에 있어서 한국은 다케시마=독도를 헌법 4조나 관련법규로 한국령이라고 정하고 경상북도의
관할 하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연합군은 물론 일본으로부터도 어떠한 이의 제기가 없었습니다. 국제법상으로도 도의적인 면으로도 전혀 문제없는 합법적인 조치였습니다.
인계가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후에 주한미군이
한국정부에 다케시마=독도 사용요청을 제출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51년6월20일 미국 제8군의 콜터 장군은 다케시마=독도를 폭격훈련에 사용하고 싶다는 요청을 장면
수상에게 요청하여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았습니다.(주2.) 미군정청이 다케시마=독도를 완전히 한국에 인도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일본은 미국에 맹렬한 로비활동을
펼쳤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실상의 주일대사라고도 할 수 있는
시볼드 주일정치고문에게 손을 썼습니다. 그것이
성공하여 시볼드는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하여, 다케시마=독도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국을 설치하는 일에
따르는 안전보장 면의 이점을 들어 국무성을 설득하였습니다.
다케시마=독도의 군사시설을 한국의 통치하에 설치하는 것은
6.25동란으로 영토의 범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안정적인 운용에 위험부담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시볼드는 일본통치하에 설치하는 편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미소(美蘇)대립의 냉전이 극에 달해있었기 때문에 시볼드의
제안은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은
독자적인 제6차 초안에서 다케시마= 독도를 일본령으로 규정 했습니다.
그러나 조약은 미국단독의 생각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합군을 구성하는 각국의 승인을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이라고 한 영국 초안과의 조정은 중요했습니다. 결국 미영공동초안에서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하는 조문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외무성의 팜플릿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주목해야만 할 것은 다케시마=독도를 자국령으로 하려는 한일양국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엄연한 사실입니다.
7월 9일 미영공동의 제2차 공동초안은 댈러스 국무장관고문으로부터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에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조차 미국국무성의 견해는 한결같이 않았습니다.
7월13일 북동아시아과장의 보좌관인 피어리는 국무성의
지리담당관인 보그스에게 남사제도(Spratly Island)나 리앙쿠르암(岩)등 문제가 될만한 섬들에 관해 의견을 구했습니다. 보그스는 리앙쿠르암(岩)을 일본이 포기하는 섬의 명단에 추가하도록 이렇게
진언했습니다(주3).
리앙쿠르암(岩)
리앙쿠르암(다케시마)은 1949년의 조약초안에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포기하는 섬이라고 되어있다. 일본외무성이 발행한 「일본주변의 작은 섬」4장(1947년 6월)에 리앙쿠르암(岩)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조약초안에 다음과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제2장):
(a)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여 제주도나 거문도, 울릉도, 리앙쿠르암(岩)을 포함하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한을
포기한다.
불과 조약 조인의 2개월 전의 단계에서도 아직 국무성 내부에는 리앙쿠르암(岩)을 한국령으로 명기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뿌리깊었다는
것이 엿보입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6일에도 보그스는 피어리에게 진언하며 「리앙쿠르암(岩)은 한국이름이 없다」라든지 「한국에서 만든 지도에는
리앙쿠르암(岩)이 없다」등의 추가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사실은 지리담당관인 보그스조차도 리앙쿠르암(岩)이 한국에서 독도라고 불려지고 있던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7월 19일 한국 양유찬 대사는 댈러스와 만나서, 독도와 파랑섬은 일본의 한국병합이전에 한국령였으므로, 조약에서 한국령이라고 인정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댈러스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약에서 인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한국의 요구를 받아 국무성은 독도와 파랑섬이
어디에 있는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보그스가
워싱턴에 있는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부터 독도의 경도와 위도를 물어, 결국 독도가 리앙쿠르암(岩)이며 일본명으로 다케시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암초인 파랑섬은 경도 위도가 확인되지 않아, 한국정부는 영유 주장을 단념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후 파랑섬의 이름이 이어도(離於島) 가 되어, 해양과학기지를 건설되어 8명이 숙박 가능할 정도의 기지가 되었습니다(주4).
역사에「만약」은 금물입니다만, 한국이 7월 말의 시점에서 댈러스가 충고했듯이 다케시마=독도의 영유근거를 명확히 제시했다면 다케시마=독도의 한국 영유가 조약에서 승인되었을 가능성은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전쟁 중이라는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당시의 전쟁상황은 한국이 수도서울을 재탈환하여, 전투의 한편으로 휴전의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서울의 지배자가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격전을 치러, 나라는 황폐하고 모든 것이 혼란의 극에 달해, 한국은 다케시마=독도를 충분히 검토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8월10일 제대로 된 자료를 내놓지 않는 한국에 대해, 팜플릿이 적고 있는 것처럼 러스크 극동담당국무차관보는
한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아래 내용의 서간을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에게 보냈습니다.
합중국정부는, 1945년 8월 9일의 일본에 의한 포츠담선언 수락이 이 선언에서 취급된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정식 내지 최종적인 주권 포기를
구성한다는 이론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취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 암(岩)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無人)인 이 바위섬은 우리들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도지청의 관할하에 있다. 이 섬은 일찍이 조선에 의해 영유권 주장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서간을 보면 미국은 1905년부터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 다케시마=독도는 시마네현의 관할 하에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케시마=독도의 실상을 모르던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인지, 어쨌든 의문스러운 견해입니다.
이에 대한 한국의 반론은 2개월 정도 지난 후인 10월 3일이 되어서야 한국의 변영태 외무부장관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변장관은 다케시마=독도는 시마네현의 관할하에 있는 것이 아니고, SCAPIN 677호에 의해 일본의 관할로부터 분리되어, 한국이 통치하고 있는 상황 등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강화조약이 9월8일에 조인된 뒤로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 됐었습니다.
이러한 경위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다케시마=독도는 일언반구도 기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카모토 다카시씨는 「평화조약상
다케시마를 일본이 보유하는 것이 확정되었다(주5)」라고 단정했습니다만 이것은 의문입니다.
쓰카모토씨는 그 이유로서 한국의 영유권 주장이
러스크 서간에 의해 기각된 일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마찬가지로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하는 명문규정도 배제 당해 애매모호하게 되었고, 다케시마=독도는「일본이 보유하는 섬」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원래 강화조약은 조문에서 영토의 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되는 것이 통례입니다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해서는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등의 강한 염려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독도나 하보마이ㆍ시코탄 등은 기재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분명한 결론을 내지 않은 채 미해결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외무성의 가와카미
겐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케시마=독도도 그런 (평화조약의 영토조항에서) 미해결 지역의 하나로서, 실제로 일한간에 분쟁거리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평화조약 제2조(a)에 말하는 일본이 독립을 승인하는 「조선」안에 다케시마=독도가 포함되는지 아닌지, 또는 다케시마의 시마네현 편입이라고 하는 조치를
국제법상의 영유 취득의 조건으로 보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 하는 등등의 문제의 검토는 법률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고……(주6)
다케시마=독도가 강화조약으로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강화조약에서 한국은 결코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이나 소련은 강화조약의 조인국이 아니므로, 조약에 의해 한국이나 현 러시아의 기득권익 등이
침해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약의 당사국이 아닌 제3자는 그 조약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당연한 원칙은 당시 이미 국제관습법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조약법조약(윈조약)으로서 1969년에 명확히 문서화된 것은 알려진 대로 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합법적인 지배는 강화조약에 의해
어떠한 악영향도 받지 않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강화조약에 다케시마=독도는 어째서 기술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오랫동안
의문이었습니다만 그 이유를 명백히 밝힌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일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국무성에 제출된 1952년 10월 3일자의 서간으로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국무성은 리앙쿠르암(岩)의 역사를 이미 몇 번에 걸쳐 검토한 적이 있지만, 그것을 여기에 상세히 적을 필요는 없다. 그 암은 바다표범의 번식지이며 어느 시기 조선왕조의
일부였다. 그 암은 일본이 일본의 제국을 조선까지 확장했을
때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남은 영토와 함께 병합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제국지배의 과정에 있어서 이 영역을 일본의 본토에 편입하고 어느 현의 행정
하에 두었다. 그 때문에 일본이 평화조약의 제2장에서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및 청구권」을 포기하는 일에 동의했을 때, 조약의 초안을 만든 자는 섬을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은 리앙쿠르암(岩)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은 이유가 있다라고 하고 있다. 그에 대해 한국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주7).
다케시마=독도가「조선왕조의 일부였다」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과, 「제국지배의 과정에서 이 영역을 일본의 본토에
편입했다」라고 하는 제국주의 행위와의 사이에서 연합군은 한일 어느 쪽의 해명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해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한 듯합니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 강화조약에 다케시마=독도를 명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미국은 그 후에도 같은 우호국인 한일 양국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피하려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관여해서 다케시마=독도를 한일양국 중 어느 한쪽의 소속으로 결정한다면, 다른 한쪽의 원망을 살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을 염려한 듯합니다.
(注1)塚本孝「竹島領有権をめぐる日韓両国政府の見解」『レファレンス』2002.6月
(注2)The US Military Request to Use Dokdo as a Live Bombing
Target in June 1951
http://www.geocities.com/mlovmo/page8.html
(注3)Spratly Island and the Paracels, in Draft Japanese Peace
Treaty
http://www.takeshima222.net/(連合国歴史)
TO: NA - Mr. Fearey
FROM: OIR/GE - Mr. Boggs
The following information and
suggestions are furnished in response to your telephone request this morning.
1. Spratly
・・・
2. Liancourt Rocks
The Liancourt Rocks (Takeshima) were
among the islands to which, in a 1949 draft treaty,
(a)
(b)・・・
(注4)【ルポ】離於島の鉄塔に翻る太極旗、朝鮮日報 2006.9.23
http://japanese.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23/20060923000029.html
(注5)塚本孝「戦後における竹島問題」『「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最終報告書』竹島問題研究会、2007,P77
(注6)川上健三『竹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復刻版)古今書院、
1996(初版は1966),P296
(注7)朴炳渉「アメリカ大使館の秘密書簡」『竹島=独島論争』新幹社、2007,P328
(半月城通信)http://www.han.org/a/half-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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