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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성 「다케시마」 팜플렛 비판

 

(3) 에도시대의 영유권

2008/4/15

Yahoo Japan 게시판 ‘竹島’  No.16446

 

외무성 왈() 3.일본은 울릉도로 건너갈 때의 정박장으로 또한 어채지로 다케시마를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

 

외무성의 「다케시마」팜플렛은 일본이 17세기 중반에는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근거로서, 오야와 무라카와 두 집안이 다케시마=독도를 밑의 내용처럼 이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오키에서 울릉도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다케시마는 항해의 목표나 도중의 정박장으로서, 또한 강치나 전복포획의 좋은 어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놀라운 것은 팜플렛에서 외무성이 말하는 근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대체 이전의 공식견해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전부터 외무성은 하기의 내용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울릉도로 왕복하는 도중, 정박지로서 또는, 전복등의 어채지로써 이용되고 있던 곳이 당시 마쓰시마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던 오늘날의 다케시마이다. 이 섬에 대해 오야, 무라카와 두 집안이 이전의 울릉도와 마찬가지로 막부(幕府)로부터 도해면허를 받게 된 것은 메이레키()2(1656) 또는 그 이후의 일이었다.

『은주시청합기』(1667)도 마쓰시마(지금의 다케시마) 및 다케시마(울릉도)를 일본의 서북의 한계(경계)로 보고 있다(1).

 

혹시 과거 외무성의 말처럼 오야ㆍ무라카와 두 집안이 막부로부터 마쓰시마 도해면허를 받았다고 한다면, 막부는 다케시마=독도에 대해 영유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되어, 영유의 유력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1667년 당시 오키노쿠니를 관할한 운슈 마쓰에번(雲州松江藩)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은주시청합기』에 다케시마ㆍ마쓰시마가 일본서북의 한계(경계)라고 써있다면, 이것도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영유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왜 팜플렛은 그런 유력한 근거를 가득 실은 과거의 주장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을까요? 특히『은주시청합기』의 해석에 관해서 말해보면,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정부로부터 일본서북의 경계는 오키라는 지적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한 반론이 없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은주시청합기』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말하듯, 역시 일본 서북의 한계(경계)는 다케시마ㆍ마쓰시마가 아닌, 오키노시마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은주시청합기에서 다케시마(울릉도)는 막부의 주인(朱印)을 받은 배(무역선)만이 가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외무성을 더욱 몰아치듯,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씨는 일본의 서북경계는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아닌 오키노시마임을 논증했습니다(2). 또한, 『은주시청합기』를 철저히 분석한 오오니시 토시테루(大西俊輝)씨도 비슷한 증명을 했습니다.

 

한편 외무성이 마쓰시마 도해면허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역시나 그 주장도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국회도서관의 츠카모토 타카시(塚本孝)씨도 「도해면허는 필시 발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4). 시모조 마사오씨조차 「마쓰시마 도해면허」를 주장하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일본에 있어서의 이러한 연구의 결과, 외무성의 과거의 주장은 소리도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듯 합니다. 그것은 사상누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결과 외무성은 팜플렛에 적혀있는 정도밖에 영유권의 근거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이 명확합니다.

일찍이 외무성은 에도시대에 있어서의 영유권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개국 이전의 일본에는 국제법의 적용이 없으므로, 당시에 있어서는 실제로 일본의 영토로써 취급하고, 다른 나라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영유하는데 충분하다고 인정된다(5).

 

여기에 적혀진 「실제로 일본의 영토로써 취급」이라고 하는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케시마=독도가 관찬서나 관찬지도 등의 공문서에 당연히 기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문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문서에는 다음 단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료『죽도지서부(竹島之書附)』등에서 다케시마=독도는 일본령이 아니라고 쓰여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찬지도라고 하면 막부의 그림지도나 이노 다다타카등의 지도에 다케시마=독도가 기재되어있지 않은 점은 널리 알려진 대로입니다. 한편 돗토리번(鳥取藩) 일부의 지도에 다케시마=독도가 기재되어있지만, 이것은 다음 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의 돗토리번이 다케시마=독도는 돗토리번의 영토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일본여지노정전도」를 호리 가즈오(堀和生)씨는 관찬지도라고 하고 있지만, 세키스이도는 가령 막부의 허가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막부가 발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찬지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은 17세기의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섬을 어디의 영토라고 여기고 있었을까요?

에도시대의 사료에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는 「죽도지내송도(竹嶋之內松嶋)」「죽도근변송도(竹嶋近邊松嶋)」「죽도근소지소도(竹嶋近所之小嶋)」등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마쓰시마는 다케시마(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 명확합니다(6).

마쓰시마가 소나무 한 그루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마라고 불려진 것은 다케시마와 한 쌍으로 생각해서 운수 좋은 한쌍의 송죽(松竹)이라는 발상에서 명명된 것 같습니다. 외무성이 강조하는 세키스이도에서도 두 섬은 페어 또는 일체(一體)로 표기되어 두 섬 사이에는「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隱州)」등을 써넣었습니다. 이 지도에서 마쓰시마ㆍ다케시마는 너무나 밀접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페어의 한쪽인 다케시마(울릉도가)가 조선령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는 것은 막부의 외교문서를 수록한 『통해일람』을 보면 명백합니다. 『통항일람(通航一覽』의 권129에「겐나 육 경신년(元和六庚申年) 소우쓰시마노카미요시나리(宗對島守義成) 명령에 따라서 다케시마[조선국 속도]에서 밀거래 상인 2명을 체포하여 수도로 보냄」이라고 적혀있으므로, 다케시마는 조선국의 속도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밀거래 상인은 사기사카 야자에몬(鷺坂弥左衛門), 니우에몬(仁右衛門) 부자입니다만, 그들이 이소타케시마(磯竹島, 울릉도)에서 목재를 벌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져, 그것을 조선통신사로부터 지적당했기 때문에 막부로써는 그들을 체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붙잡은 쓰시마번(對馬藩)은 일찍이 울릉도에 이주하고자 조선에 신청을 했으나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막부 및 쓰시마번은 울릉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울릉도의 부속 섬인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에서 오야ㆍ무라카와 두 집안이 어획을 행하는 것은 조선국에서의 밀어(密漁) 또는 약탈 행위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밀어나 약탈을 반복하여, 그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빈집털이범이 주인을 만나자 강도로 돌변하는 것과 같지않습니까?

 

(注1)塚本孝「竹島領有をめぐる日韓政府の見解」『レファレンス』2002.6月, P52

(注2)池敏<「州視合記(紀)」の解をめぐって>

    『大君外交と「武威」』2006, P323

(注3)大西俊輝『日本海と竹島』東洋出版, 2007

(注4)塚本孝「竹島領有問題の緯」『調査と情報』第289, 1996, P2

(注5)外務省情報文化局「竹島の領有問題の際司法裁判所への付託につき韓政府に申入れについて」『海外調査月報』1954年11月, P70

(注6)川上健三『竹島の史地理究』(復刻版)古今書院,1996, P74,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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