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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성 「다케시마」 팜플릿 비판

 

8)다케시마=독도의 폭격훈련구역지정

2008/ 5/10

Yahoo!게시판 ‘竹島’ No.16542

 

외무성왈()8. 다케시마는 1952년 주일미군의 폭격훈련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일본의 영토로 취급되었음은 분명합니다.

 

단순히 이 한가지 일만을 예로 든다면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해석도 성립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 입니다. 이것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나타내는 자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적었습니다만, 1951 6월 주한미군의 콜터 장군은 한국정부에 다케시마=독도를 폭격훈련구역으로 사용하는 허가를 한국정부로부터 얻었습니다. 이 일만을 다르면 미국은 다케시마=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취급했다는 결론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지적했습니다만 외무성과 같이 자료를 자의적으로 선택한다면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까지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전인수격인 행동은 단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고, 정보은폐라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반되는 견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모순이 적은 논리를 전개하는 일입니다만, 팜플릿에는 그 기본이 빠져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위에 쓴 것처럼 상반되는 미국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미국은 위의 서간이 쓰여진 1년 사이에 다케시마=독도의 영유주체를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견해를 바꾼 것일까요?

더욱 기간을 좁혀보면 주한미군의 행동으로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았는 사이,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이 아니라 일본령이라고 보게 된 것일까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콜터 서간과 러스크 서간이 쓰여지게 된 배경에 있습니다. 러스크 서간의 배경에 관해서는 이미 적은 대로 국무성은 독도에 관해서 거의 무식했습니다. 그 서간이 쓰여지기 불과 일주일 전에 워싱턴에 있는 자료 중에서 독도관련 자료를 찾아 보려고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무성은 독도의 역사는커녕 그 존재여부조차도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콜터 서간의 배경입니다만, 주한미군은 어떤 잊혀지지 않는 사건 덕분에 독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이 독립하기 직전 아직 미군정청(美軍政廳)이 다케시마=독도를 관할하고 있던 때에 일어난 제1차 독도폭격사건입니다.

1948 68일 다케시마=독도에 출어(出漁)하고 있던 한국인 어부들이 오키나와로부터 날아온 B29기의 폭격에 의해 수십 명이 사망 하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대사건은 한국독립전의 제헌국회에 즉시 제기되어, 미국 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 군은 폭격훈련을 중지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독립 후, 독도를 잘 알고 있던 주한미군은 다케시마=독도를 관할하는 한국정부로부터 다케시마=독도의 폭격사용허가를 얻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결국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할 것인가, 한국령으로 생각할 것인가라고 하는 견해의 차이는 다케시마=독도를 미국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가에 기인하고 있던 것에 따릅니다. 독도를 거의 모르고 있던 국무성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여기고, 독도를 잘 알고 있던 주한미군은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으로서 취급했던 것입니다.

독도를 잘 몰랐던 것은 재일미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일미군 및 그 뜻을 받은 GHQ는 제1차 독도폭격사건 때 연습구역의 경고를 일본에만 하고 한국의 미군정청이나 한국정부에게 알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유로서 GHQ의 맥가더와 미군정청 하지 장군과의 사이가 나빴다는 설이 속삭여 있습니다.

 

이 폭격사건과 같은 일이 1952년에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2차 독도폭격사건입니다. 팜플릿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일미행정협정에 바탕을 두고 설립된 일미합동위원회는 다케시마=독도를 폭격훈련구역으로 지정하고 주일미군이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9 7일 주한미군은 다케시마=독도에 민간과학조사대를 파견하고 싶다는 한국해군 참모장의 신청을 허가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해상의 통제권은 UN, 실질적으로는 미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다케시마=독도의 폭격은 915일과 22일 두 번 실시되었습니다. 다행히 다케시마=독도에서 조업하고 있던 한국인 어부와 해녀들은 긴급히 피난해 가까스로 재난을 피했습니다. 또한 과학조사대도 다케시마=독도에 2Km정도 접근한 단계였기 때문에 재난을 면해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1).

 

이 제2차 독도폭격사건에 의해 일미한 3개국간에 다케시마=독도문제가 갑자기 주목 받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도 쓴 것처럼 103일 주일 미대사관은 국무성에 보고하기를,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나 일본의 영유권주장에 대응하는 한국의 근거 있는 이의주장 등을 고려해, 미국이 이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하는 뜻을 전했습니다.

또한 주한 미국대사관도 다케시마=독도를 훈련장으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미국이 한일의 영토분쟁에 말려들 염려가 있다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대사관의 견해에 응하여 국무성의 영 북동아시아과장은 문제의 러스크 서간으로부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이르는 국무성의 입장을 설명하고, 국무성은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에 속한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일미합동위원회의 사격장 지정은 정당화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러스크 서간은 설령 무지에 기인 한다고 해도, 일단 외교문서로서 제출된 이상 외교상으로는 그것이 국무성의 원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한미군이나 극동공군의 생각은 물론 국무성과 달랐습니다. 2차 폭격사건을 둘러싸고 한국 내에서 미군의 과실을 추궁하는 여론이 일자 극동공군의 웨일런드 사령관은 한국외무부장관의 신청을 받아들여, 1953227일 다케시마=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하여 다케시마=독도의 폭격을 중지한 것을 한국에 통보했습니다.

 

이 통보의 내용을 한국의 국방장관이 발표하자, 일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미국 군이 일방적으로 폭격중지를 발표했기 때문에 일본의 체면은 완전히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웨일런드 사령관이 독도=다케시마를 한국령으로 인정한 발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훗날 국무성은 웨일런드 사령관이 그러한 견해를 보였다는 일은 없다고 부정한 듯 합니다만, 국방부의 발표가 사실이라고 해도 무엇 하나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그때까지의 주한미군은 다케시마=독도를 한국령으로 취급하여 한국정부와 교섭해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무성관할하의 주한미국대사관조차 국무성이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임시대리대사인 라이트너는 일미 합동위원회의 폭격구역지정은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미국이 승인하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표명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국무성은 러스크 서간이나 국무성의 견해를 일본정부는 물론이고 관계자인 주한미국대사관에 조차 폭격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래 러스크 서간은 독도를 거의 알지 못한 채 졸속으로 작성된데다가, 후에 재검토에 의해 다케시마=독도가「어느 시기 조선왕조의 일부였다」라는 사실이 판명되는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정말로 공개할만한 자료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도 문제의 러스크 서간은 일본정부에 대하여 수 십 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것을 공개하면 영토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더 격해지리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일양국을 반공의 방파제로서의 위치에 놓고, 양국의 양호한 우호관계를 원함과 동시에 양국간의 영토문제에 휘말리는 일을 피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미국을 믿고 의지해서, 외무성은 팜플릿에서 「다케시마가 합동위원회에서 협의되고, 또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구역으로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곧 다케시마가 일본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아전인수입니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응하여「오히려 미 공군사령관은 한국정부의 항의에 응하여 1953227일 한국정부에 대하여 독도를 지정연습지로부터 제외하는 뜻을 정식으로 통고했다(2)」라고 반론했습니다.

만일 미국이 다케시마=독도가 일본령이라고 하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연습지의 지정을 취소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다케시마=독도의 북쪽에 새로운 연습지를 일부러 설정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일미합동위원회의 조치를 논거로 하는 주장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지적은 이미 1953년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참의원(參議院) 외무, 법무합동위원회에서 외무성 출신의 소네 에키(曾祢益) 의원은 폭격연습지문제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다케시마=독도가) 이른바 미국의 연습지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를 드는 것은 오히려 (영토권의) 논거를 약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어떠한 사정으로 연습지로부터 뺀다면 반대로 한국측의 주장을 응원하는듯한 논거를 이쪽에서 제공하는 일이 되는 위험이 있다. 그러한 논거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을까, 이것이 제일먼저 질문하고 싶은 점입니다(3).

 

소네 의원은 다케시마=독도는 물론 일본령이라는 입장에서 질문 한 것입니다만, 외교관으로서의 경험이 풍부한 소네 의원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듯 합니다. 이에 대해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 정무위원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행정협정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네씨는 그것은 근거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일 미국이 다케시마를 한국령이라고 본다면 한국과의 약정에 따라 한국정부의 동의를 얻어 시설을 사용한다는 입장을 취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일미행정협의의 규정에 따라서 일미 합동위원회에 동의를 얻어 시설을 빌리려고 했다는 것은 일미간의 문제입니다만, 이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무성은 무식한지, 정보를 숨기려고 하는 것인지, 일찍이 미국이 다케시마를 한국령이라 보고 「한국과의 약정에 의해 한국정부의 동의를 얻어서 시설을 사용」했던 「명백한 사실」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소네 의원과 같이 단 이노(團伊能) 의원도 일미합동위원회의 건은 오히려 일본의 약점이 된다고 하여 이렇게 발언 했습니다.

 

나는 소네 씨의 행정협정관계의 논거, 오히려 이 영유에 관한 문제를 침해하는 듯한 형태로 약점이 된다는 생각에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좀 전에 한국의 발표에 있었던, 진위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으나, 웬라이토 기타의 다른 통고라고 하는 것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3).

 

 

이 기록에서 웬라이토는 웨일런드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50여 년 전에 이미 일미합동위원회의 논거는 일본의 약점이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외무성은 질리지도 않는지 되풀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외무성은 무척이나 영유권의 논거 찾기에 고생하고 있는지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주장을 채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注1)朴炳渉「アメリカ大使館秘密書簡」『竹島=独島論争』新幹社、2007,P327

   박병섭「미국 대사관의 비밀 서간」『독도=다케시마 논쟁』보고사, 2008,P324

(注2)塚本孝「竹島領有権をめぐる日韓両国政府の見解」『レファレンス』2002.6、P64

(注3)第15回 国会参議院 外務・法務連合委員会 会議録第1号、1953.3.5

 

  (半月城通信)http://www.han.org/a/half-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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