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성 「다케시마」 팜플릿 비판
(6) 대한제국 칙령과 시마네현 고시
2008/ 4/27
Yahoo Japan 게시판 ‘竹島’ No. 16502
외무성의 팜플릿 왈(曰) 「6. 일본정부는 1905년 다케시마를 시마네현에 편입하여, 다케시마 영유 의사를 재확인했습니다 」
외무성이 재확인을 강조했다고 말하므로 이전에도 다케시마 영유의사를 확인한 적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대체 언제일까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현재의 외무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50여년전의 외무성은 환상같은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도해면허를 믿고 있었으므로, 처음으로 영유의사를 확인한 것은 수백년 전의 환상의 도해면허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면 메이지시대에 확인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수백년 전의 도해면허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이야기조차 되지 않습니다. 가와카미 켄조가 주장한 환상같은 마쓰시마도해면허는 최근에는 쓰카모토 다카시씨나 이케우치 사토시씨 등에 의하여 모조리 부정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메이지시대에 확인을 바라는 것의 가능성입니다만, 50여 년전의 외무성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당시 메이지 시대의 외무성은 마쓰시마라고 하는 섬의 개척 청원서를 제출받았을 때, 이섬이 어느 섬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명확히 하기위해 시찰을 행할 필요가 있을지 어떨지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도중생략)
와타나베(渡邊) 기록국장은 「이 소위 마쓰시마라고 하는 섬이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라면 그에게 속하고 만약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 이외의 섬이라면 우리에게 속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마쓰시마를 본래 다케시마 즉 울릉도로 하고 우리의 마쓰시마는 서양의 이름으로 호르네트럭스인 것 같다・・・이 호르네트럭스가 우리나라에 속하는 것은 각국의 지도를 보면 확실하다」,「구 막부는 평온함을 바라기보다는・・・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를 가지고・・・조선에 양도했다고는 하지만 마쓰시마(지금의 다케시마)가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보다 일본에 가깝다면, 일본에 속하고, 조선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라고 기술하고, 시찰의 결과 이 마쓰시마가 울릉도와 다른 섬이라면 이나바, 오키, 이와미 등에 돌려주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메이지 13년 9월 군함 아마기(天城)가 실제로 항해하여 이섬을 측량한 결과 문제의 마쓰시마는 울릉도이고,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죽서(竹嶼)가 있음이 명확해졌다. 마쓰시마개척청원의 심의에 임해서 명확한 점은 메이지 초기에 있어서도 일본국 정부가 다케시마를 일본고유의 영토로 인식해서, 그 사실에 입각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주1)
50여년 전의 외무성은 메이지 정부도 다케시마를 일본고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는 근거를 단지 외무성의 일개 국장의 견해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와타나베 고키 국장의 지도 등에 관한 견해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쓴 그대로입니다(주2).
이러한 견해를 주요골자로 해서 외무성은 고유영토의 증명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아전인수도 심합니다. 당시의 결정적 자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고유영토의 결론을 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서 외무성이 지금도 말하고자 하지 않는 메이지시대의 중요사료는 밑에 적은 것과 같습니다.
(1)외무성 보고서「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 交際始末 內探書)」(주3)
보고서안에「다케시마 마쓰시마 조선부속이 된 경위」라는 제목의 글이있습니다.
(2)태정관・정원지지과(太政官・正院地誌課)『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주4)
『일본지지제요』는 지리담당당국에 의한 관찬지지이므로 일본지지제요에 다케시마=독도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일 입니다. 『일본지지제요』에는 오키의 작은 섬 179를 「혼슈(本州)에 속해 있는 섬」으로 기록하고, 그 외에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부터 메이지 시대의 지리학자 다나카 아카마로 등은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일본령이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관찬지지에서도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한 쌍으로 취급되고 있는 점은 중요합니다.
(3)내무성지리국『기죽도사략(磯竹島事略)』,『의죽도각서(礒竹島覚書)』(주5)
두 책에 쓰여있는 내용은 거의 같고 에도시대의 「다케시마일건」 전말을 빠짐없이 적고 있습니다. 『기죽도사략』과 『의죽도각서』는 내무성이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 밖이라고 판단한 기초자료로서 중요합니다.
이 두 책은 물론 돗토리번의 『죽도지서부』등도 기재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자료에서 다케시마, 마쓰시마가
돗토리번을
포함해서 어느 번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사실이나 막부가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4)태정관「다케시마 외일도(竹島外一島)」영토외지령(주6)
1877년 외무성은 지적편찬사업에 있어서 문제가 된 다케시마, 마쓰시마는 일본령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영토를 버리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태정관에게 허가를 청했습니다.
내무성의 질문서중에 「기죽도략도」가 있습니다만, 이 지도에도 마쓰시마는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라는 것이 명료합니다.
태정관은 내무성의 질문서의 내용대로 다케시마(울릉도)및 외일도인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를 영토 밖이라고 결정하는 지령을 2주 뒤에 발령하였습니다.
(5)내무성지리국의 관찬지도(주7)
국토나 영토의 담당기관인 지리국이 작성한 관찬지도에서는 다케시마, 마쓰시마는 일본의 식민지시대를 제외하고는 일본령으로서 취급되어지지 않았습니다. 1905년 이전 메이지시대의 관찬지도는 밑의 내용과 같습니다.
(A) 1867년「관판 실측일본지도(官板 実測日本地圖)」, 막부출판(1870년에 메이지정부의 카이세이학교(開成学校)에서 재발간)
(B) 1879년「대일본부현관할도(大日本府縣管轄圖)」,내무성지리국출판
(C) 1880년「대일본전도」, 내무성지리국출판
(D) 1881년『대일본부현분할도(大日本府縣分轄圖)』, 내무성지리국출판 (1883년에 개정발간)
이들 관찬지도에서 다케시마=독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D)『대일본부현 분할도』중의 극동도(極東圖)인 「대일본전국략도(大日本全國略圖)」뿐입니다. 다만, 『대일본부현분할도』중의 시마네현등 각 부, 현의 지도에는 다케시마=독도는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것 이외의 지도에 다케시마=독도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대일본전국략도」의 경우, 초판에서는 다케시마, 마쓰시마는 산인도(山陰道)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성자의 무지에 따른 실수로 생각되었는지, 개정판에서는 정정되어 무채색으로 그려졌습니다. 즉 이렇게 틀린곳을 정정했다는 것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 적은 것처럼 지리담당 당국의 관찬지도나 관찬지지, 또는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의 지령등은 모두다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이 아니라고 다루고 있습니다. 팜플릿은 이러한 메이지시대의 공적인
사료를 모르는 척하며,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강변해 오고 있는 듯 합니다. 「고유영토」의 주장이 무리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번의 팜플릿에서 사진으로 공개한 각의결정서를 보아도 명백합니다.
각의결정서는 다케시마=독도를 무주지로 판정해서 국제법상의 선점(先占)논리에 따라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하는 각의결정을 한 것입니다. 무주지라고 하는 메이지 정부의 판단은 「고유영토」의 주장에 모순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한 메이지정부의 조치는 이리떼들의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비추어 보아도 위법이며 무효입니다. 마쓰시마(다케시마=독도) 가 조선령임은 위에 적은 대로 내무성이나 외무성,
태정관등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대한제국에서는 다케시마=독도는 칙령에 따라 울도군의 일부로 개편되어, 법적으로도 명확히 문서화 되었습니다. 그것을 팜플릿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1900년의 ‘대한제국 칙령41호’에 의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감을 군수로 한다는 것을 공포한 기록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칙령 가운데, 울릉군이 관할하는 지역을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竹島는 울릉도 근방에 있는 ‘죽서(竹嶼)’라는 작은 섬이지만,
‘석도’는 바로 지금의 ‘독도’를 가리킨다고 지적하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방언으로 ‘돌(石)’을 ‘독’으로도 발음하며, 이를 발음대로 한자로 고치면 ‘独島’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팜플릿의 오류입니다만 「鬱陵郡」은「欝島郡」의 실수입니다. 또한 칙령의 원문을 중시한다면, 「鬱陵島」가 아니고 「欝陵島」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일부러 획수가 많은 「鬱」자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팜플릿은 독도라고 하는 명칭이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사용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나타냈습니다만, 이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당시 울릉도 현지에서는 일찍이 우산도 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다케시마=독도는 독섬 아니면 독도로 불려지고 있었으나 독섬의 한자표기가 석도에서 어떻게 해서 독도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해명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도가 다케시마=독도임은 많은 일본인 연구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주8).
일반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이름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일본에서도 다케시마=독도의 이름은 마쓰시마로부터 호르네토나 리엥코르토, 리앙쿠르, 량코, 양코 등등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려졌습니다.
또한 당시 울릉도에 살고 있던 일본인은 다케시마=독도를
「다마고지마(卵島)」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卵島」의 읽는 법은 량코도로 미루어 짐작해 「란도」라고 읽기 쉽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다마고지마 입니다(주10).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섬의 다양한 명칭이 다케시마=독도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결국은 석도를 다케시마=독도 이외의 섬으로 판단하기는 곤란하므로, 팜플릿은 그것을 고려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6-7 만일 이 (섬 이름의) 의문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이 칙령의 공포를 전후해 조선이 다케시마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이 없어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영유권은 확립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칙령이 말하는 석도가 다케시마=독도라면 칙령의 공포자체가 다케시마=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 됩니다. 또한 칙령의 공포 후에는 다케시마=독도에서의 어업이 왕성했으나 다케시마=독도에 출어한 일본인이나 한국인 어부는 울릉도를 기지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본해군의 군함・니이다카(新高)의 행동일지에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때의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인은 리양코, 한국인은 독도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주11).
이렇듯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告示) 이전의 문헌에서도 독도라고 불려진 섬은 울릉도의 부속 섬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케시마=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지위가 더더욱 확실해져, 세종실록에서 말하듯 두 섬이 한 쌍이라는 인식은 확고부동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으므로, 1906년에 시마네현의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 울도군수 심흥택은 그 전말을 보고서에 「본 군 소속 독도가 외양 백여 리에 있다」 라고 적은 것입니다(주12). 이로써 울도군수가 이미 다케시마=독도를 울도군의 부속섬으로서 자기의 관할 하에 두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심흥택은 그 이전부터 한국인이 독도라고 부르는 섬에 울릉도로부터 빈번히 출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1905년 이전부터 다케시마=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임이 뚜렷하고, 법적으로도 울도군의 부속섬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므로, 다케시마=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며,
시마네현의 고시가 무효임이 확실합니다.
(注1)塚本孝「竹島領有権をめぐる日韓両国政府の見解」『レファレンス』2002.6月号、P58
(注2)半月城通信<外務省の「竹島・松島」島名混乱と結論>
http://www.han.org/a/half-moon/hm094.html#No.684
(注3)「朝鮮國 交際始末 內探書」
http://www.han.org/a/half-moon/shiryou/shisho_jpn/kousai_shimatsu.pdf
(注4)『日本地誌提要』卷之五十、「隱岐」
http://www.kr-jp.net/meiji/meiji_msc/chishi-teiyou.pdf
(注5)『磯竹島事略』
http://www.kr-jp.net/meiji/meiji_msc/jiryaku1875.html
(注6)太政官「竹島外一島」版圖外指令
http://www.kr-jp.net/meiji/koubun/koubun.html
(注7)半月城通信<証拠としての竹島=独島地図、舩杉氏への批判>
http://www.han.org/a/half-moon/hm129.html#No.949
(注8)半月城通信<勅令にいう「石島」はどこ?>
http://www.han.org/a/half-moon/hm131.html#No.959
(注9)坪井九馬三「鬱陵島」『歷史地理』第38卷3号、1921,P167
(注10)坪井九馬三「竹島に就いて」『歷史地理』第56卷1号、1930,P34
(注11)『軍艦新高行動日誌』1904年9月25日
(注12)內藤浩之<宋炳基「欝島郡守 沈興澤報告書」>『北東アジア文化硏究』2006,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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