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메이지(明治)정부의 다케시마=독도 인식

鳥取短期大『北東アジア文化硏究』28

박병섭

1. 들어가며

 

일본에서 다케시마=독도는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에 이르기까지 마쓰시마라고 불리고, 울릉도가 다케시마 또는 이소타케시마(磯竹島)라고 불리고 있었다. 마쓰시마라고는 하지만 소나무(-마쓰)는 커녕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마라고 불린 것은 다케시마와 한 쌍으로 혹은 다케시마의 부속 섬으로서 여겨져, 행운을 비는 뜻에서「마쓰(), 다케()」이라고 이름을 붙인 듯하다. 이러한 마쓰시마와 다케시마를 메이지 정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당시의 관찬지지(官撰地誌)와 관찬지도(官撰地図)등으로 분명히 밝혀본다.

또한 글 중에「다케시마」는 인용문 등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현재의 울릉도를 가리키며,「마쓰시마」는 다케시마=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또한 메이지 시대의 문서는 거의 가타카나로 표기되어 있으나, 쉬운 이해를 위해 히라가나로 바꾸었다. 마찬가지로 옛 한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자로 바꾸었다.

 

 

2. 관찬지지(官撰地誌)에 나타나는 다케시마ㆍ마쓰시마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달성한 신() 정부는, 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책을 펼쳤다. 이러한 시책의 일환으로 국토의 상세한 지도작성이나, 지지편찬, 지적편찬(地籍編纂)등을 실시했다. 그 중에서도 국가로서 관찬지지의 편찬은 고대 나라(奈良)시대의 「풍토기(風土記)」이후, 사실 천 년만의 본격적인 관찬지지 편찬사업이었다.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1872(메이지5), 태정관(太政官)에 정원지지과(正院地誌課)를 설치했다. 태정관은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 참의(參議) 등으로 구성되는 국가의 최고행정기관이며, 내무성을 비롯한 각 성을 관할했다.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한다.

정원지지과는 2년 후 내무성지리료(務省地理寮)로 이동하였으나,그 다음해 다시 정원지지과로 되돌아가는 등 어지러울 정도로 조직의 변천을 겪었다. 최종적으로는 내무성지리국에 지리과(地誌課) 1878년에 신설되어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는 사이 관찬지지인『일본지지개요(日本地誌提要)』를 순차적으로 편찬해서, 1879년까지 전 8, 77권을 간행했다. 그 중 제4, 50권 「오키(隱岐)」에,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혼슈(本州)의 속도. 치부리(知夫) 45. 아마(海士) 16. 스키(周吉) 75. 오치(穩地) 43. 합계 179. 이를 총칭하여 오키의 코지마라고 함.

○ 또한, 서북방향에 마쓰시마ㆍ다케시마 두 개의 섬이 있음. 토속이 대대로 전해진다고 함. 오치군 후쿠라항()으로부터 마쓰시마에 닿는다. 해로(海路) 65 35. 다케시마에 다다름. 해로 약 100 4정 남짓. 조선까지는 해로 360 30.

 

이 관찬지에서 다케시마ㆍ마쓰시마가 혼슈의 부속 도()와는 따로 기재되어 있어 이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다케시마ㆍ마쓰시마가 혼슈의 속도가 아니라면, 물론 큐슈나 홋카이도의 속도도 아니며 두섬은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취급 받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메이지 시대의 지리학자인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도 그렇게 생각하고 『지리잡지』200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메이지 초에 이르러, 정원지지과에서 이것(다케시마=독도, 필자주)이 본국의 영유인 것을 완전히 부인했기 때문에, 이후에 출판되는 지도에서는 대부분 이 섬의 소재를 표시하지 않았다. 메이지8년 문부성 출판 미야모토 산페이(宮本三平)씨의 일본제국전도에서는 이를 기재하였으나 제국의 영토밖에 두고 색을 칠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해군 수로부의 조선수로지에는, 리앙코-토 암이라고 이름 붙여, 리앙코-토 호의 발견과 기타 외국인의 측량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다나카는 이 논문에서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일시적으로 혼동하였으나, 다케시마든 마쓰시마든 간에 관찬지지가 이 두 섬을 일본의 영토 외라고 했다라고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상과 같이, 메이지 정부가 이 두 섬의 영유를 부인 한 것은 내무성이 이 두 섬의 역사를 충분히 조사한 결과였다. 이 정밀조사의 기록이『이소타케시마 각서(磯竹島)』이다.

 

 

3. 『이소타케시마 각서』와 「다케시마 잇켄(竹島一件)

 

1875, 태정관 정원지지과의 나카무라 겐키(中邨 元起) 는 에도 막부 관계사료나 쓰시마번정사료(對馬藩政史料), 돗토리번정사료(鳥取藩政史料)등의 고문서를 모아, 다케시마를 포기한 경위를 정리한 『이소타케시마각서』를 교정했다.[] 『이소타케시마각서』는 특히 에도 시대에 있었던 「다케시마 잇켄(一件)」을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케시마 잇켄은 막부의 특별허가를 얻어 다케시마에서 어업활동을 하고 있던 요나고(米子)의 오오야가(大谷家)가 겐로쿠 시기에 다케시마에서 만난 조선인 어부 안용복 등을 납치한 사건과 이 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조선과, 조선과의 교섭을 맡고 있던 쓰시마번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다케시마 영유권 논쟁을 말한다.

『이소타케시마각서』는 나중에 내무성이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 외()라고 판단할 때에 기본자료가 되었던 중요한 사료이다. 『이소타케시마각서』는 사본에 따라서는 표지의 제목이『이소타케시마 사략(事略), 본문의 제목이「이소타케시마각서」라고 되어 있으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다만 『이소타케시마사략』은「건()」「곤()」의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이소타케시마각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다. 『이소타케시마각서』의 「건」권은「다케시마 잇켄」에 관해서 교환했던 쓰시마번과 조선간의 초기 서간이나 이에 관련된 쓰시마번내의 구상서(口上書), 조선측 주장의 근거가 된 『여지승람』, 『지봉유설』등의 관련사료 등을 싣고 있다. 『이소타케시마사략』의 「곤」권은 다케시마 잇켄의 교섭이 중단 된 겐로쿠8(1695)년 이후, 쓰시마번이 막부와 함께 해결책을 모색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으로 다케시마 잇켄의 전체적인 과정을 알 수 있다.

다케시마 잇켄의 해결책으로서 쓰시마번은 막부가 당초 주장한 방침대로 조선인의 다케시마도해를 금지시키고자 교섭을 계속할 것을 주장한데 대해, 막부는 독자적으로 실행한 조사를 근거로 당초의 방침을 변경, 다케시마를 포기하려고 했다. 막부의 독자적인 조사는 이나바(因幡)ㆍ호우키(伯耆)를 지배하는 돗토리번에 대한 질문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최초의 질문은 7개의 조항으로, 내용은 「인슈(因州,이나바)하쿠슈(伯州,호우키)부속의 다케시마」가 언제부터 이나바ㆍ호우키의 부속이 되었는가, 다케시마는 어떠한 섬인가, 또 다른 섬이 있는가, 혹은 다케시마 도해의 실황 등이었다.

이에 대한 돗토리번의 회답에서 주목 할 만한 것은, 다케시마가 돗토리번의 소속이 아님을 확실히 밝히고 있고, 게다가 「다케시마, 마쓰시마 그 외에 양국 부속의 섬」은 없다고 대답한 데있다. 막부는 돗토리번의 회답서에 마쓰시마가 새롭게 등장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마쓰시마에 관한 상세한 질문을 추가했다.[]

실은 막부에서는 그때까지 마쓰시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돗토리번의 회답을 결정적 근거로, 막부는 다케시마 등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다.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쓰시마번과 협의, 최종적으로 조선에 당초의 요구와는 반대로 일본인의 다케시마 도해금지 결정을 전했다.

내무성은 이러한 상세한 경위를 『이소타케시마각서』에 정리해서 기술했기 때문에, 내무성이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모두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인식해서 『일본지지제요』를 편찬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한 쌍으로 하는 표현은 에도 시대에는 일반적이었다. 1667년 오키군대(郡代,군수대리)의 사이토 도요노부(藤豊宣)는 번의 명령을 따라 오키의 지지를 조사해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를 저술했으나, 은주시청합기에도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한 쌍으로 취급했다. 또한, 에도 시대 중ㆍ후기에 널리 사용된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지도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1779)등에서도 이 두 섬을 한 쌍으로 기술했고, 또한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조선국과 마찬가지로 무채색으로 표시되어있다. 이것은 『은주시청합기』가 은주를 일본의 서북의 한계로 하고,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 외()라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4. 태정관의 다케시마외 일도 영토 외() 지령

 

메이지 정부는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 밖으로 하는 방침을 1905년「리양코도(다케시마=독도) 편입」까지 일관해서 유지했다. 그 한 예로 지적(地籍) 편찬사업을 들 수 있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인 토지대장을 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적 편찬사업을 실시했으나, 그 과정에서 다케시마의 지적이 문제가 되었다. 1876(메이지9), 내무성지리료의 다지리(田尻) 등이 시마네현을 순회했을 때 다케시마의 정보를 접하고, 이것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시마네현의 지적편제계()에 다케시마를 조회했다.

조회요청을 받은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에 도해하고 있었던 오오야가의 기록 등을 조사해, 그 서류 등을 첨부, 같은 해 10 16일 내무경() 앞으로 질의서「일본해내 다케시마외일도 지적편찬방사(日本海 竹島外一島 地籍編纂方伺)」를 제출했다. 「외일도」는 마쓰시마를 가리킨다. 이때 시마네현이 지리료의 사서(伺書,질문서)에는 없었던 「외일도」를 일부러 사서에 덧붙인 것은, 오오야가의 자료에 「다케시마 근해 마쓰시마」, 「다케시마의 내() 마쓰시마」등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마쓰시마는 다케시마와 한 쌍으로, 혹은 다케시마의 부속 섬이라고 하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시마네현 사서의 부속서류「유래의 개략()」에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시마네현 사서부속「유래의 개략」]

이소타케시마 혹은 다케시마라고 부름. 오키노쿠니(隱岐國)의 북서방향 120리에 있다. 주위 약10리 산새가 험준하고 평지가 적다. 강이 3개 있으며 또한 폭포가 있다. 그리고 그윽하고 깊은 계곡 속에 수목과 대나무가 울창하여 그 근원을 알기가 어렵다……  다음에 또 하나의 섬이 있어 마쓰시마라고 부른다. 주위 약 30정 다케시마로 가는 뱃길 위에 있다. 오키와의 거리 약 80. 나무가 적고 물고기와 짐승이 난다. (1리는 4km, 1정은 110m)

 

이 문장에서 마쓰시마 즉 외일도가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를 말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 예를 들면 호리 카즈오(堀和生) ,[] 쓰카모토 다카시(塚本孝),[] 나이토 세이츄(內藤正中)[] 들도 마쓰시마가 현재의 다케시마=독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 중에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다케시마외일도」에 관한 견해를 매년 이다시피 바꾸고 있어, 그 이색함이 주목 받고 있다. 2004년에 시모조는 ‘「다케시마외일도」의「일도」가 지금의 다케시마를 말하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라고 적고 있었으나,[] 2006년에는 일변해서「외일도라는 것은 당시의 마쓰시마, 현재의 다케시마를 카리킨다고 생각한다.[]」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데도 2007 3월에는 다시 주장을 바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마네현이 문의한 「다케시마외일도」와 태정관이 판단한「다케시마외일도」는 다른 것이다. 『공문록』에 첨부한 시마네현 제출의 「이소타케시마 약도」에는 현재의 다케시마와 이소타케시마(현재의 울릉도)가 그려져 있어, 시마네현에서는 울릉도와 다케시마를 일본령으로 인식하고 있다. (도중 생략)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정관이「관계없다」라고 한 「다케시마외일도」는 두 개의 울릉도를 가리키고 있어, 현재의 다케시마와는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시모조는 이 문장에서 시마네현은 「외일도」를 다케시마=독도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나, 태정관은「외일도」를 울릉도라고 인식하고, 양자의 이해가 틀렸다고 적었다. 이러한 견해는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좌장(座長)으로서 내보였던 만큼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아 시모조는 좌장으로서의 견해를 변경해, 시마네현이 말하는「외일도」도 울릉도를 말한다고 해서 ‘「다케시마」만이 아니라 「마쓰시마」역시 울릉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다케시마외일도」는 모두 현재의 울릉도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다시 자기의 주장을 바꿨다.[10] 이렇듯 자신의 주장을 어떠한 설명도 없이 연신 바꾸는 것은 너무나도 예에 어긋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마쓰시마가 지금의 다케시마=독도임은 『공문록』내무성지부에 보존돼있는 「일본해내 죽도외일도 지적 편찬방사(編纂方伺)」의 부속지도「이소타케시마 약(「磯竹島略)」에서 보더라도 일목요연하다. 이 지도에 그려진 마쓰시마는 동서의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으로, 누가 보더라도 현재의 다케시마=독도임이 명확하다. 이 지도는 시마네현이 오오야가의 도면을 근거로 작성했으나, 이것을 내무성이 내무성의 사서(伺書)에 첨부해 태정관에 제출했다. 따라서 마쓰시마에 관한 지리적 인식은 시마네현과 내무성, 태정관이 모두 같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시마네현으로부터의 사서(伺書)를 받은 내무성은 다케시마외일도를 본국과는 관계없다는 결론을 신중히 내렸다. 일찍이 내무성은 『일본지지제요』나『이소타케시마각서』를 편찬하고, 두 섬을 일본의 영토 밖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 위에 「영토의 취사(取捨)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인식으로 다음해 3, 만약을 위해 태정관에 사서「일본해내 다케시마외일도 지적편찬방사」를 제출했다.

태정관에 제출된 사서는 태정관 조사국에서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내무성의 견해를 그대로 인정하는 지령안이 작성되어 품의에 돌렸다. 이것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참의 오오쿠마 시게노부(重信), 참의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참의 오오키 다카토우(大木喬任)등에 의해 승인, 날인을 얻어, 내무성에 전달되었다. 이 지령은 내용이 중대한 만큼 관계서류와 함께 『태정류전(太政類典)』에도 「일본해내 다케시마외일도를 영토 외로 정함」이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3 29[10]

일본해내 다케시마외일도를 영토 외()라고 정함〕

내무성사()

다케시마 건에 대해 시마네현으로부터 질문서가 제출되어 조사한 바, 해당 섬은 겐로쿠 5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별지서류에 적은 것과 같이 겐로쿠 9 5월 제1호 구 정부 논의의 뜻에 의해, 2호 역관에게 준 서류, 3호 해당국으로부터 온 공식문서, 4호 본국의 회답 및 구상서 등과 같이 겐로쿠 12년에 각각 서류의 오고 감이 끝나고 본국과는 관계없다고 들었으나 영토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만약을 위해 별지 서류를 첨부하여 문의합니다

317일 내무

(주서,朱書) 문의 한 다케시마외일도의 건은 본국과는 관계없음을 명심 할 것

329

 

이렇듯, 메이지 시대의 최고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은 내무성이 상주한대로, 다케시마, 마쓰시마를 한 세트로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이 두 섬을 일본령으로 하지 않는 지령을 내무성에 내렸다. 또한 내무성으로부터 시마네현에 태정관의 지령이 전달되므로써 이 문제는 전부 종결되었다.

 

 

5. 관찬지도 등에 있어서의 다케시마ㆍ마쓰시마

 

에도 시대 막부는 몇 번이나 각 번()에 국가의 그림지도를 작성할 것을 명령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전체의 국회도(國繪圖)를 작성했다. 대표적인 국회도는 게이쵸도(慶長圖,1605), 쇼보도(正保圖,1644), 겐로쿠도(元祿圖,1697), 텐포도(天保圖,1831)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지도에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기록되지 않았다. 각 번의 그림지도나 막부의 일본전체 국회도에서는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일본령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가 되어 막부는 이노우 다다타카(伊能忠敬)의 측량을 기초로 하여 근대적인 관찬지도를 작성했다. 「대일본연해실측전도」, 흔히「이노우도()」라고 불려지나, 그 지도에도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기술되지 않았다. 이것은 겐로쿠시대의 「다케사마잇켄」의 결과로 보아 당연한 일이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의 초기에 걸쳐 이노우도를 바탕으로 관찬지지가 출판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관찬지지란 지리나 국토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 작성한 지도를 말하며, 그 이외의 정부기관이 작성한 지도를 관제지도라고 정의한다.

 

(1)일본의 관찬지도

에도 시대부터「다케시마영토편입」이전의 메이지 시대에 작성된 관찬지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a)1821년「대일본연해실측전도(실측여지전도)」막부작성, 속칭「이노우도」

(b)1867년「관판(官板)실측일본전도」막부출판, 1870년에 메이지정부의 가이세이(開成)학교에서 재판

(c)1879년 「대일본부현관할도(大日本府県管轄)」내무성지리국 출판

(d)1880년「대일본국전도」내무성지리국 출판

(e)1881년「대일본분현분할도(大日本府県分轄)」내무성지리국, 1882년 개정

 

상기의 관찬지도에 다케시마=독도가 포함된 것은 유일하게 (e)「대일본부현분할도」(지도장)뿐으로, 그 이외의 지도에 다케시마=독도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대일본부현분할도」에서도 다케시마=독도는 시마네현 등의 각 부현도에 그려지지 않고, 일본과 조선을 포함하는 극동아시아 전체를 그린「대일본전국략도」에만 그려졌다. 또한 주목할 것은 초판의「대일본전국략도」는 마쓰시마를 산인도(山陰道), 즉 일본의 서북지방과 같은 색으로 칠하고 있으나, 개정판에서는 마쓰시마를 무채색으로 표기 한 것이다. 개정판에서 초판을 잘못을 정정, 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 외()로 표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덧붙여 말한다면, 위에 적은 모든 지도와 다음의 관제지도에 다케시마=독도의 다른 이름인「리앙쿠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리앙쿠르편입」이전에 메이지정부의 관찬지도는 모두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 외라고 표현했다라고 할 수 있다.

 

(2)일본의 관제지도

메이지 시대 내무성 이외의 정부기관에서 작성된 일본지도는 다음과 같다.

 

(a)육군참모국「대일본전도」1877, 다케시마ㆍ마쓰시마 기재되지 않음

(b)문부성「일본제국전도」1877,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조선과 함께 무채색

(c)육군육지측량부「집제이십만분일도일람표(輯製二十万分一)

1885년제도, 1890년 수정, 1892년 재 수정. 마쓰시마는 없고 다케시마에 해당하는 섬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섬 이름은 기재되지 않았다.

 

위에 적은 모든 지도에서 다케시마=독도는 기재되지 않거나, 기재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령외()로 취급되었다. 1905년 이전, 모든 관제일본지도에서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영토외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관제지도와는 따로 해군수로국은 해도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대일본해안실측도』를 메이지12(1879)년에 발간했다. 그 중에 일본 및 조선을 그린「일본해안전도」에 울릉도가 마쓰시마로, 다케시마=독도가 리앙코르토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이 이름은 영국해군 해도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수로국의 전신인 수로료는 메이지 9(1876)에 「조선동해안도」를 발간했으나, 거기에는 울릉도가「마쓰시마」로, 다케시마=독도가「오리우츠아 및 메네라이초()」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있다.

이러한 군용지도나 해도는 지리적인 인식을 나타낼 뿐이기 때문에 군용지도나 해도로부터 리앙코르토 등의 섬에 대한 국가의 영유의식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독도가 서양의 이름으로 리앙코르토 등으로 명명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수로국에서는 일본에서 예부터 전해져 오던 마쓰시마라고 하는 이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6. 외무성의 다케시마ㆍ마쓰시마 인식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일본영외()로 하는 인식은 외무성도 마찬가지였다. 1869(메이지2) 외무성은 조선과의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의 내정을 조사하려, 태정관의 허가를 얻어 외무성의 고위관리인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사이토 사카에(藤榮)등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다음해 보고서『조선국 교제시말(交際始末)내탐서(探書)』를 제출했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 안에 「竹島松島 朝鮮付に相成候始末 -다케시마 마쓰시마 조선부속으로 된 경위」라는 제목의 항목을 만들어 이렇게 적었다.

 

다케시마 마쓰시마 조선부속으로 된 경위

마쓰시마는 다케시마에 이웃 섬으로, 마쓰시마에 대해 이제까지 게재한 기록도 없다.다케시마의 건에 대해서는 겐로쿠(元祿) 연도이후 잠시 동안은 조선에서 거류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한 바 있었으나, 현재는 이전처럼 무인도가 되여, 대나무나 또는 대나무 보다 두꺼운 갈대를 생산하고, 인삼 등이 자연적으로 자라고 그 외의 물고기 등도 상당하다고 들었던 것이다.

 

이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외무성도 다케시마ㆍ마쓰시마는 겐로쿠시기 이후에 조선령이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외무성으로부터 조선 내탐의 보고를 받은 태정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겐로쿠 시기 이후의 덴포(天保)기에도 이마즈야 하치우에몬(今津屋八右衛門)사건을 계기로 다케시마로의 도해나 출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일본은 관민(官民)이 해외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그러한 풍조 속에서 자원이 풍부한 다케시마(울릉도)가 새삼스레 주목 받게 되었다. 울릉도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해양자원 등을 목적으로 외무성에「마쓰시마개척의 의(), 「마쓰시마 개척원」 등이 1876년부터 78년에 걸쳐 계속 제출되었다. 이러한 개척 청원서에서 말하는 「마쓰시마」는 실은 예로부터의 다케시마, 즉 울릉도를 가리킨다. 이때쯤에는 외국의 잘못된 지도의 영향을 받아, 울릉도를 마쓰시마라고 부르는 민간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쓰시마개척원을 접수한 외무성은 「마쓰시마」라는 섬의 소재를 놓고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쓰시마와 다케시마의 위치관계는 물론, 심하게는 오키의 앞바다 부근에 있는 섬이 2개인지 3개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외무성은 온갖 설이 분분한 가운데, 차츰 개척원에서 말하는 마쓰시마는 예전부터 다케시마로 불러오던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국장이었던 와타나베 고우키(洪基)는「그 마쓰시마 데라세섬은 본래 다케시마 즉 울릉도이고, 우리의 마쓰시마는 서양의 이름으로 호르네토 로크스일 것이다」라고 말해, 개척원의 마쓰시마는 예전의 다케시마(울릉도)이며, 예전의 마쓰시마는 호르네토 로크스(다케시마=독도)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또한 공신국장인 다나베 타이치(太一)는 개척원의 마쓰시마는 예전의 다케시마, 즉 「조선의 울릉도」라고 판단하고, 개척원을 기각하는 의견을 붙였다. 게다가 예전의 마쓰시마에 관해서는「듣자 하니, 마쓰시마는 우리나라사람이 붙인 이름으로, 사실은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이다」라고 말해, 예부터 전해지는 마쓰시마는 울릉도 부속의 우산도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듯 외무성에서는 예전의 마쓰시마와 개척원의 마쓰시마를 대체로 올바르게 구별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편 울릉도 주변의 측량은 1878 6월 해군수로국에 의해 행해졌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예전의 다케시마는 영국해군의 해도에 의거해 「마쓰시마」라는 이름으로『수로잡지』에 공표되었다.[11] 또한 1880년에「수로보고 제33호」에서도 「마쓰시마 한인(韓人)은 울릉도라고 부른다」라고 보고되었다.[12] 이 수로국의 판단은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외무성의 기타자와 세이세이(正誠)는 「오늘날의 마쓰시마는 겐로쿠 12년부터 다케시마로 불려 왔고 예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라고 조사보고서『다케시마고증(竹島考證)』에 기록했다. 다른 한편 기타자와는 당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고 있던 다케시마에 관해서는 수로국의 인식「다케시마(竹嶼) 조선인은 이를 다케시마(竹島)라고 한다[13]」라는 것을 바탕으로 했는지, 다케시마를 울릉도 동쪽의 다케시마로 생각하여, 「다케시마(竹島)는 하나의 암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다케시마고증』에 기록했다. 또한 기타자와는 울릉도에 관해서는 그 역사를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상세히 조사했으나, 다케시마=독도에 관해서는 별다른 지식이 없었는지,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7. 해군성의 다케시마ㆍ마쓰시마 인식

 

메이지 시대 초기의 섬 이름 혼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은 것이 수로국의 후신인 수로부이다. 1894년 수로부는 『조선수로지』를 발행하면서, 울릉도를 「일명 마쓰시마」라고 기재했다. 이것은 해도나 『수로잡지』와 비교해 훨씬 영향력이 커서, 이 이후에는 예전의 다케시마, 즉 울릉도를 일본에서 정식으로 마쓰시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의 마쓰시마 즉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에서 그 고유명칭을 잃고, 대신 서양의 이름인 호르네토나 리앙쿠르, 줄여서 리양코, 양코 등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수로지』에도 다케시마=독도는 리앙코르토열암으로서 다음과 같이 기재되었다.

 

리앙코르토열암

이 열암은 서기 1849년 프랑스의 기선「리앙코르토」호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해 배이름을 따서 리앙코르토열암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후 1854년 러시아의 함정「파라스」호는 이 열암을 메나라이 및 오리부차열암이라고 이름 붙였다, 1855년 영국의 함정「호르네토」호는 이 열암을 탐험해서 호르네토열암이라고 이름 붙이고 호르네토의 함장 홀시스의 말에 의하면, 이 열암은 북위 3714분 동경 13155분에 위치하는 두개 불모지의 암서로 새 똥이 섬 위에 쌓여 섬의 색이 하얗다. 그리고 북서쪽에 서 남동쪽에 동 길이 약 1리의 두 개의 섬이 있고 두 섬의 거리는 4리이며 암초의 줄기가 있어 이 두 섬을 연결하고 있다.

 

리앙코르토열암을 『조선수로지』에만 기재하고 있고, 같은 시기에 발행된 『일본수로지』에는 기재하지 않은 것은 매우 두드러진 일이다.  원래 『일본수로지』의 취급 범위는 일본의 영토ㆍ영해에 한정되어 있었다.[14] 따라서, 리앙코르토열암이 일본령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일본의 서북해역을 다룬 『일본수로지』제4(1897)에 당연히 기재되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울릉도나 다케시마=독도에 해당하는 섬은 기술하지 않았고, 관계된 일본 해도에도 이 두 섬은 기재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의 도서(島嶼) 등을 확인하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국경을 획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수로부가 리앙코르토, 즉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영토 외()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태정관이나 내무성, 육군, 해군, 외무성, 문부성등, 다케시마ㆍ마쓰시마와 관계 깊은 모든 정부기관은 울릉도와 다케시마=독도를 조선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 다케시마=독도의 편입

 

제국주의 국가로서 순조로운 발전을 이룬 일본은 차츰 조선이나 만주 등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현저히 증가하고, 메이지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어업분야에서는 일본은 1898년에 원양어업장려법, 1902년에 외국영해수산조합법을 제정해, 일관되게 일본의 해외진출을 장려하고, 민관일체가 되어 조선의 어장에 몰려들었다. 그 결과 울릉도에서의 일본인의 어업이 번성하게 되어, 이윽고 1903년 즈음에는 오키 주민이나 울릉도 주민(한국인 및 일본인) 사이에 다케시마=독도에서의 강치잡이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강치기름 등이 전쟁특수를 맞아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다케시마=독도에서의 강치잡이는 마구잡이, 과열경쟁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폐해를 피하고자, 다케시마=독도에서의 강치잡이 독점권을 노린 어민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는 분주하게 일본정부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을 시마네 교육계 편  『시마네현지(島根県誌)(1923)은 「37년 각 방면에서 경쟁적으로 수렵 행해짐. 각종 폐해를 낳고 있다. 이에 나카이는 이 섬을 조선영토라고 생각하고, 상경해서 농상무성을 설득 정부에 이 섬을 대여 해줄 것을 청원했다」라고 적고 있다. 나카이가 리양코섬을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 조선정부에 대여를 청원하려고 한 것은 그가 시마네현에 제출한 그의 이력서를 보아도 명백하다.

나카이는 농상무성의 마키 보쿠신(牧朴眞) 수산국장이나, 해군수로부의 키모쓰키 카네유키(肝付兼行)부장들과 접촉, 수로부로부터 리양코섬의 소속은 「확실한 증거없음, 특히 일한 양국으로부터의 거리를 측정해보면, 일본 쪽이 10해리 가깝고…… 일본령으로 편입하는 것이 적절하다」라는 견해를 얻었다. 수로부는 앞서 말한 듯이 리양코섬을 조선령으로 판단하고 『일본수로지』가 아닌『조선수로지』에 기재 했으나, 이러한 판단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 나카이는 「리양코도대하원」을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정부에 제출하게 된 것이지만, 이것에 내무성이 처음은 반대하였다. 일찍이 내무성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외()로 하는 태정관의 지령을 받았었던 만큼, 나카이의 청원서에 대해「이 시국에 있어서 한국영토로 의심되는 일개 불모지인 암초를 받아들인다면, 주변의 제 외국에 우리나라가 한국병합의 야심을 품고 있다는 의혹을 크게 한다」라고 헤서 일단 기각했다.

그러나 외무성의 생각은 달랐다. 정무국장인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는 「이러한 시국이니 만큼 그 섬의 영토편입을 급히 요하며, 망루를 건축하고, 무선 혹은 해저전신을 설치한다면 적함감시상 매우 좋을 것이다, 특히 외교상 내무성과 같은 고려를 할 필요는 없다. 마땅히 신속하게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시켜야 한다」라고 나카이를 독촉했다.

야마자의 견해는, 당시 일본의 전황에서 당연한 발상이었다. 동해(일본해)에서 일본의 수송선이 러시아의 우라지오 함대에 의해 차례로 침몰당해, 일본군은 군수물자의 보급에 지장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동해지역에 있어서의 군사시설의 강화가 급선무였고, 울릉도나 다케시마=독도는 군사상의 중요한 지점으로 떠올랐다.

또한 외교관계를 보면 이 시기 일본은 영일동맹이나 카쓰라ㆍ태프트조약을 체결하고 있어, 더는 조선문제로 서구열강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내무성은 이러한 외무성의 상황판단을 따라 1905 2월 나카이가 제출한 「리양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貸下願) 」을 각의에 부쳐, 정식으로 각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일본정부가 다케시마=독도를 영토 편입한 논리는 「무주지」인 리양코도에 나카이가 1903년이래「이주」했기 때문에, 이것을 국제법상의 점령으로 인정해서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무리한 점이 있다. 먼저, 나카이는 다케시마=독도에 여름에만 매번 열흘 정도 머무르는 것에 그쳐 「이주」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일본정부가 조선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리양코도를 무주지로 판단한 것이다. 일찍이 메이지 정부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내무성이나 외무성, 육군, 해군, 태정관등의 관계기관이 이 섬을 조선령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판단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것이었다.

각의결정 후 영토편입은 정부 내에서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관보에 의한 고시도 하지 않은 채, 겨우 정부의 훈령을 받은 시마네현이 222, 현 고시 40호로 이 섬을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오키 도사(島司)의 소관으로 한다는 공표를 한데 그쳤다.

이렇듯 일본의 다케시마=독도편입은 정부수준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국민은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요매스컴조차 이를 알지 못했다. 고시가 있고 3개월 이상 지난 5 30일 역사적인 동해(일본해)해전의 승리를 전하는 거의 모든 신문은 정부가 명명한「다케시마」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외국명인 「리앙코르토암」이라는 이름을 얼마간 사용하고 있었다.[15] 해군성은 수로부를 갖고 있어서, 국경에 관해서는 숙지하고 있어야 할 터였으나, 해군성에서조차 「다케시마」편입의 각의결정을 잘 알고 있지 못했던 듯하다. 또한 해당지방의 산인(山陰)신문은 현 고시를「오키의 새로운 섬」이라는 표제로 작게 보도했다. 시마네에서도 예전의 마쓰시마라는 이름은 잊혀져 버려 다케시마=독도는 새로운 섬으로 취급 됐다.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고유영토의식은 전무했던 듯하다.

 

 

9. 끝으로

 

  메이지 정부는 다케시마에 관해 에도 시대의 역사를 세밀히 조사하여 『이소타케시마각서』를 편찬했다. 그래서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울릉도)를 일본령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케시마(울릉도)에의 도항을 금지한 것을 조선에 전달한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와 함께 마쓰시마가 어느 번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것을 납득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세워 내무성은 1877년에 시마네현으로부터 다케시마ㆍ마쓰시마의 지적편찬에 관한 사서가 제출되었을 때 이 두 섬을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위에 만약을 위해 「영토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인식하에 신중히 태정관에 사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다케시마ㆍ마쓰시마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메이지 정부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 메이지정부의 결정에 따라서 내무성은 관찬지도나 관찬지지에서 울릉도와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외()로 기술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무성만이 아니라 문부성이나, 육군성등도 마찬가지여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관제지도에서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일본의 영토외()로 기술했다. 또한 해군성도 같은 방침으로 다케시마ㆍ마쓰시마를  『일본수로지』에 기술하지 않고『조선수로지』에 기술한 것이었다.

그 후 제국주의 국가로서 발전한 일본은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에 「시국이 이러한 만큼 그 영토의 편입을 급히 요한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다케시마=독도의 영토편입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그때의 명분은 다케시마=독도는「무주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재 일본정부가 주장하는「다케시마 고유영토」설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大熊良一『竹島史稿』原書房、1968, p254

[] 塚本孝「竹島関係旧鳥取藩文書および絵図(上)」、『レファレンス』第411号、1985p86

[] 池内敏『君外交と「武威」』名古屋大学出版会、2006, p351

[] 堀和生「1905 日本の竹島領土編入」、『朝鮮史研究会論文集』第24号、1987p103

[] 塚本孝「竹島領有権問題の経緯」、『調査と情報』第289号、1996p5

[] 内藤正中・朴炳渉『竹島=独島論争』新幹社2007p20

[] 下條正男『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文春新書、2004p123

[] 下條正男『発信 竹島』山陰中央新報社、2006p19

[] 下條正男「最終報告にあたって」、『「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最終報告書』竹島問題研究会、2007p2

[10] 下條正男「日本の領土「竹島」の歴史を改竄せし者たちよ」、『諸君』、2007p103

[11] 『水路雑誌』第16号、海軍水路局、18837月、p42

[12] 北澤正誠『竹島考證』下、1881

[13] 『水路雑誌』第41号、海軍水路局、18837月、p35

[14] 堀和生、前掲論文、p105

[15] 「官報」、明治38529日・30